한국사찰음식의 역사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전해온 지혜의 밥상

한국사찰음식_국가 의례 음식에서
한국에 불교가 전래된 뒤 국가에 의해 불교가 공식적으로 승인되고 받아들여지면서
불교정신이 담긴 음식문화는 널리 전파됩니다.
불교가 전래된 삼국시대에 왕실과 귀족들이 앞장서서 채식을 권장함으로써 불교적 식생활은 점차 퍼지게 되었습니다.
불교를 숭상했던 고려 시대에는 육식을 자제하고 채식을 권장하는 식문화가 널리 확산되었고, 대규모의 각종 국가적 불교 의례를 거행하면서 사찰음식이 정교하게 발전했을 것으로 보이나 상세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습니다.
9~10세기에 이르러 한국에도 선불교가 본격적으로 전래되기 시작했고 선종의 노동윤리 또한 함께 들어왔습니다.
선불교는 초기에 중앙이 아닌 지방의 호족들에게 환영 받으며 척박한 산중에서 수행생활을 유지했습니다.
물자가 부족하고 외부 지원이 빈약한 상황에서 스스로 먹을 것을 재배하여 먹는 선불교의 생활방식은 생존의 필수적인 선택이었고, 그 결과 한국 선불교에 있어서 노동은 윤리를 넘어서 수행의 핵심적인 가치로 자리
잡았습니다.
한국의 사찰음식은 이러한 과정을 겪으며 기후와 풍토에 맞고 직접 길러 먹을 수 있는 농작물과 채소류를 적극 활용하며 발전해 왔습니다.
그리고 숭유억불의 조선시대에서는 불교가 일반 백성들의 생활 속에 보다 깊이 파고들면서 서민들의 음식문화에까지 깊이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노동하는 불교_스스로 기른 농작물 스스로 조리한 음식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一日不作 一日不食)’
불교가 중국으로 전해진 초기에는 왕실과 부유층이 사원경제를 지원해 주었습니다.
국가 차원에서 사찰을 만들고 왕실과 귀족들이 거대한 토지와 재물을 기증함으로써 불교는 탁발하지 않아도 식생활을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뒤늦게 출발한 선종(禪宗)은 이런 관습을 거부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백장회해(720-814) 입니다.
마조도일의 수제자인 백장은 선종사찰의 생활윤리인 청규를 지어 공동노동을 의무화하고 사찰 토지의 경작에 솔선수범했습니다. 그가 정한 노동의 원칙은 지금 북방불교의 가장 중요한 특징인 울력이라고 하는
공동노동으로 남아있습니다.
사원 공동체에 속한 사람은 누구도 매일 매일의 예불과 수행, 울력을 거부할 수 없습니다.
백장회해는 나이 90이 넘어서도 자신이 정한 노동 원칙에 충실했습니다. 아침마다 쟁기나 호미를 들고 밭에 나갔습니다.
이 모습을 보는 제자들의 마음은 걱정이 가득했습니다. 그만하라고 말려도 듣지 않았고, 결국 제자들은 쟁기와 호미를 감추어버렸습니다.
여느 때처럼 일을 나가려던 백장은 연장이 보이지 않자 곧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차리고 조용히 방으로 돌아갔습니다.
일하지 않았으므로 먹을 자격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一日不作 一日不食)’ 라는 말이 여기서 생겼습니다.

걸식을 통해 만나는 일상식
부처님 당시의 식생활은 경전에서 상세하게 묘사하는 것처럼 얻어먹는 걸식이었습니다.
생산 활동에 종사하지 않는 수행자는 일반 세속인들이 주는 음식에 의지해 생존해야 했습니다.
하루 한 번 다 같이 마을에 들어가 줄을 지어 걷거나 혹은 흩어져 밥을 얻어먹었습니다. 주어지는 음식에 대한 선택권은 없으며 때로는 아무것도 얻지 못할 때도 있었고, 그런 날에는 굶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수행자가 먹는 음식이라는 점에서 사찰음식의 초기적 모습을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그 시대의 그 지역 사람들이 먹는 일상 음식이라는 점입니다.
저장 기능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이었기에 제철 음식을 먹었고, 교통이 불편하던 시절이었기에 구할 수 있는 지역 재료로만 만든 음식이며, 탁발을 나서서 만나는 다양한 사람들이 먹는 일상 음식이라는 점이 사찰음식의
원형을 추측하게 해줍니다.
둘째는 수행자들에게 드리기 위해 재료와 조리에 특별하게 신경 써서 만든 음식이라는 것입니다. 살생을 금지한 부처님 뜻에 따라 고기를 사용하지 않고 향신료를 제한한 곡류와 채소 위주의 공양 음식을 만들어 보시
공덕을 짓고자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