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찰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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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생명에게 감사하고 온 세상의 화평을 기원하는 음식, 사찰음식

한국사찰음식 역사

마침 아침 공양 때라 부처님께서는 가사와 발우를 지니시고 탁발을 위해 사위성
성안에 들어가셨다. 그곳에서 차례대로 탁발을 하시고 본래 계시던 곳으로 돌아오셔서
공양을 마치시고 가사와 발우를 제자리에 내려놓고 두 발을 씻으신 다음
준비된 자리에 앉으셨다.
「 금강경 」

걸식을 통해 만나는 일상식

부처님 당시의 식생활은 경전에서 상세하게 묘사하는 것처럼 얻어먹는 걸식이었습니다.
생산 활동에 종사하지 않은 수행자는 일반 세속인들이 주는 음식에 의지해 생존해야 했습니다.
하루 한번 다 같이 마을에 들어가 줄을 지어 걷거나 혹은 흩어져 밥을 얻었습니다.

주어지는 음식에 대한 선택권은 없으며 때로는 아무 것도 얻지 못할 때고 있었고,
그런 날에는 굶을 뿐이었습니다.

아프거나 탁발을 나갈 수 없는 이는 다른 수행자가 얻어온 것을 공평하게 나누어 함께 먹었습니다. 걸식한 음식은 한 자리에 앉아 다 먹어야
했으며 정오 이후에는 아무 것도 먹을 수 없습니다. 개인 소유물은 최소한의 옷과 탁발한 그룻, 약간의 양만 허용될 뿐 극도로 청빈한 삶이
요구되었습니다. 걸식을 통해 주는 대로 먹던 이 시기에는 사찰음식이라는 것이 생겨나기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수행자가 먹는 음식이라는 점에서 사찰음식의 초기적 모습은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그 시대의 그 지역 사람들이 먹는 일상 음식이라는 점입니다. 저장 기능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이기에 제철 음식을 먹었고, 교통이
불편하던 시절이기에 구할 수 있는 지역 재료로만 만든 음식이며, 탁발을 나서서 만나는 다양한 사람들이 먹는 일상음식이라는 점이
사찰음식의 원형을 추측하게 해줍니다.
둘째는 수행자들에게 드리기 위해 재료와 조리에 특별하게 신경 써서 만든 음식이라는 것입니다.
살생을 금지한 부처님의 뜻에 따라 고기를 사용하지 않고 곡류와 채소를 주로 하고 자극적인 향신료를 피한 공양 음식을 만들어 보시 공덕을
짓고자 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단의 융성과 지리적 확산 _ 다양한 기후조건과 식재료

세월이 흘러 부처님의 교단이 성장하면서 함께 생활하고 나누는 공동체의 원역을 정할 필요가
생겼습니다.'한 사찰에 머물거나 의식에 참여하는 모든 수행자의 무리'인 현전승가(現前僧伽)에서는
여전히 함께 생활하고 나누는 공동체 정신이 지켜졌습니다.

경계 밖에서 오는 이들에게는 최소한의 음식, 의복, 탕약, 승방의 네가지를 제공했습니다. 공동체 구역에 들어선 이에게 구성원들과 동등한
권리와 대우를 보장한 이 정신은 불교가 특정 지역과 시대에 갇히지 않고 보편적인 세계의 정신으로 발전하는 아주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현장스님이 먼 인도의 나란다대학으로 유학하고 귀국길에 수많은 경전을 가져올 수 있었던 것도, 혜초((慧超, 704~787)스님이 신라에서 출발
하여 중국을 거쳐 인도 여러 나라를 오랫동안 여행한 뒤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을 저술한 것도 오가는 길에서 만난 모든 절에서 남이
아닌 한 식구로 대우하며 보살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지리와 풍토가 다른, 세계 여러 지역으로 불교가 널리 전파되면서 수행자들이 먹는 음식 또한 다양해졌습니다.
농업생산물이 풍요로운 지역에서는 다양한 식재료를 즐길 수 있었을 것이고, 사막과 고산지대에서는 상대적으로 좋은 음식을 얻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저 최소한의 생존을 유지할 정도의 음식만으로 견뎌야 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으나, 이 모든 생활상의 어려움을 이겨내고 불교는
세계 도처로 전파되었습니다.

사찰이 커지고 지역마다 생겨나면서 공동 생활하는 수행자들의 식생활도 점차 체계가 잡혔습니다. 아침의 탁발로 생활하는 지역은 초기 교단의
모습을 계속 유지했지만, 탁발이 어려운 경우는 지역 유력자의 호의나 사찰에 기증된 재산을 바탕으로 식생활을 해결하게 되었습니다.
계율에서 금하지 않는 지역의 식재료를 구입하여 조리하여 먹게 됨으로써 비로소 사찰음식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노동하는 불교 _ 스스로 기른 농작물 스스로 조리한 음식

불교가 중국으로 전해진 초기에는 왕실과 부유층이 사원경제를 지원해주었습니다.
국가 차원에서 사찰을 만들고 왕실과 귀족들이 거대한 토지와 재물을 기증함으로써 불교는 탁발하지
않아도 식생활을 해결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뒤늦게 출발한 선종(禪宗)은 이런 관습을 거부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백장회해(720~814)입니다.
마조도일의 수제자인 백장은 선종사찰의 생활윤리인 청규를 지어 공동노동을 의무화하고 사찰토지의 경작에 솔선수범했습니다.
그가 정한 노동의 원칙은 지금 북방불교의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남았습니다. 울력이라고 하는 공동노동이 그것입니다.
사원공동체에 속한 사람은 누구도 매일 매일의 예불과 수행, 울력을 거부할 수 없습니다.

백장회해는 나이 90이 넘어서도 자신이 정한 노동원칙에 충실했습니다. 아침마다 쟁기나 호미를 들고 밭에 나갔습니다.
90이 넘은 노인이 밭일하러 나가는 모습을 보는 제자들의 마음은 걱정이 가득했습니다. 그만 하라고 말려도 듣지 않았고, 결국 제자들은 호미와
쟁기를 감추어버렸습니다. 여느 때처럼 일을 나가려던 백장은 연장이 보이지 않자 곧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차리고 조용히 방으로 돌아갔습니다.
일하지 않았으므로 먹을 자격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一日不作 一日不食)'는 말이 여기에서
생겼습니다. 제자들은 스승에게 잘못을 빌고 다시 연장을 내놓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사찰에 기증된 토지에서 스스로 작물을 재배하여 조리해 먹는 선불교는 검박한 생활태도와 노동윤리로 인해 민중의 지지를 받음으로써, 때로
어려운 박해시기를 만나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노동하여 거둔 수확물로 음식을 만들어 함께 먹는 선종 특유의 사찰음식이
발달하였습니다.

한국사찰음식 _ 국가 의례 음식에서 일반 백성의 음식까지

한국에 불교가 전래된 뒤 국가에 의해 불교가 공식적으로 승인되고 받아들여지면서 불교정신이
담긴 음식문화는 널리 전파됩니다.신라 법흥왕이 서기529년 살생을 금지하라는 영을 내린(삼국사기)
기록과, 백제29대 법왕(재위 599~600)때 살생을 금지시키고 민가에서 기르는 매나 새매 따위를
놓아주고, 또 물고기 잡는 기구를 불태워 버리고 고기 잡는 것을 일체 금지했다는 (삼국유사) 기록이
법왕금살(法王禁殺) 항목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불교가 전래된 삼국시대에 왕실과 귀족들이 앞장서서 채식을 권장함으로써 불교적 식생활은 점차 퍼지게 되었습니다. 불교를 숭상했던
고려시대에는 육식을 자제하고 채식을 권장하는 식문화가 널리 확산되었고, 대규모의 각종 국가적 불교 의례를 거행하면서 사찰음식이 정교
하게 발전했을 것으로 보이나 상세한 기록은 전하지 않고 있습니다.

9~10세기에 이르러 한국에도 선불교가 본격적으로 전래되기 시작했고 선종의 노동윤리 또한 함께 들어 왔습니다.
선불교는 초기에 중앙이 아닌 지방의 호족들에게 환영받으며 척박한 산중에서 수행생활을 유지했습니다. 물자가 부족하고 외부 지원이 빈약한
상황에서 스스로 먹을 것을 길러먹는 선불교의 생활방식은 생존의 필수적인 선택이었고, 그 결과 한국 선불교에 있어서 노동은 윤리(倫理)를
넘어서서 수행의 핵심적인 가치로 자리 잡았습니다.

한국의 사찰음식은 이러한 과정을 겪으며 기후와 풍토에 맞고 직접 길러 먹을 수 있는 농작물과 채소류를 적극 활용하며 발전해 왔습니다.
그리고 숭유억불의 조선시대에서는 불교가 일반 백성들의 생활 속에 보다 깊이 파고들면서 서민들의 음식문화 속에까지 깊이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